3. 정의의 조건
그들은 모두 공평함을 추구한다. 그들이 다른 것은 공평함에 대한 결론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조커는 세상에 공평한 것은 오직 '혼돈'이며 자신을 세상에 공평함을 가져 올 '혼돈의 사도'라 부른다. 영화 속에서, 음산한 배경음과 함께하는 조커의 고백을 되뇌이며, 아이들과 묻는다. "혼돈이란 무엇인가?" 이 무슨 갑작스런 끝판왕의 출현인가. 당황하는 아이들에게 다시 합체를 명한다. 파워레인져 합체의 레이져 빔까지는 아니어도 AA 건전지 2개 들이 후레쉬 만큼의 지성의 불빛으로 다시, 이 어두운 무지의 숲을 헤쳐가 보자.
영화의 첫 부분-은행강도를 하면서 동료들이 서로를 쏘아 죽이게 하는 장면부터 영화의 마지막-범죄자와 시민을 각각 태운 두 척의 배에 서로를 폭파시킬 수 있는 리모컨을 주고 서로를 죽이면 살려주겠다 제안을 하는 장면까지 조커가 하는 범죄는 이상하리만치 고정적인 패턴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며 왜 그러한가? 모둠별로 토의하며 이야기를 북돋는다. 이야기를 잘 이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기억을 돕기 위해 영화 속 조커의 범죄 장면을 인쇄하여 돌리기도 한다. 그렇게 토론을 나누고 발표하며 해답을 찾는다.
조커가 원하는 혼돈이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 어떤 신뢰도 부정되는 세계, 오로지 생존을 향한 이기심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 이외의 질서란 모두 무너진 세계이다. 그에게 '공평함'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만들어진 질서는 모두 위선이며 강자들의 속임수이다. 이들에는 '배트맨'도 포함된다. 그러나 조커는 그를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그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세상을 겁박한다. 왜인가? 그것은 배트맨이야말로 그가 원하는 혼돈을 세상에 구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지? 배트맨은 영웅 아니던가? 다시 묻는다. 배트맨, 당신은 영웅인가?
배트맨이 믿는 공평함이란 사법질서이다. 법의 공정한 집행이 이루어진다면 고담시는 공평한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문제는 사법질서를 집행하는 공권력이 부패했다는 것. 그 무너진 고리를 자신의 노력으로 떠받쳐 사법질서의 순환을 이루어 내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다. 신출귀몰이라는 신속함과 공포로 그의 시도는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조커가 꽤뚫어본 그의 근본적인 모순은 그의 활약이 더해갈수록, 그가 지키려는 사법질서는 '그로 인해' 무너져간다는 것이다. 고담시의 어느 누구도 그에게 범죄 혐의자를 구타, 폭행, 협박, 납치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대다수의 시민이 묵묵히 지켜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절차와 준법의 의무를 그 혼자 깡그리 무시해도 된다는 허락을, 어느 누구도 공식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아이들이 흥분한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냐고, 결국 고담시의 범죄율이 낮아졌으므로 세상은 보다 정의로워진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잠시 분위기를 가라 앉힌 후,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군이 학생들에게 묻는다.
영화의 앞부분, 마약을 거래하는 현장에 배트맨을 흉내낸 청년들이 총을 들고 그들을 단죄하려 했던 장면이다. 어설픈 공격으로 되려 마약조직원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때 배트맨이 나타나 그들을 구한다. 그러나 그들을 당황스럽게 한 것은, 마약조직원들을 묶어 놓은 자리 옆에 배트맨 청년들을 같이 묶어 놓은 것이다. 당신을 도우려 했다는 말을 배트맨은 차갑게 외면한다. 불끈한 청년 하나가 묻는다. 당신과 내가 다른 것이 뭐요? 배트맨이 답한다. "나는 하키 보호대 따윈 입지 않아." 아이들과 묻는다. 그들의 차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강인한 육체와 특수한 갑옷, 현란한 기계를 가진 자만이 지키는 것인가? 그러한 육체와 갑옷과 기계란 브루스 웨인과 같은 대기업 총수의 재력으로나 유지될 수 있는 것일 터, 그렇다면 우리 사는 세상의 정의란 대한민국의 0.001%의 희생으로 지켜지는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쯤에서, 끝판왕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아이들은 아직 준비가 안됐지만 지금이 이 끝판왕과 만날 괜찮은 때라고 다시군은 생각한다. 잠시 멈추고, 묻자. "정의란 무엇인가?" 전에도 말했지만, 끝판왕은 그럴 만하니까 끝판왕인 것이다. 한방에 그를 물리칠 방법이란 없다. 그저 꾸준히 질문을 이어 해답을 찾을 뿐. 브루스 웨인이 지키려고 한 것은 정말 '정의'였을까? 브루스 웨인은 정말 '정의'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정의'란 정말 그렇게 해야 지켜지는 것인가?
영웅 배트맨의 정의를 의심하는 것에 여전히 분개하는 아이들을 타일러 영화 속 또 한 장면을 돌아보게 한다. 배트맨이 지지하는 고담시의 정의로운 검사 하비덴트와 배트맨이 사랑하는 여인 레이첼, 조커가 그 둘을 납치하여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폭탄과 함께 두었을 때 배트맨은 조커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심문한다. 그 정도쯤이야, 어쨌든 액션영화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조커가 도저히 물리적으로 단 한 사람을 구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 되었을 즈음 두 사람이 잡혀 있는 주소를 알려주었을 때 배트맨이 달려간 곳은 어디였는가? 배트맨은 배트 바이크를 전속력으로 몰아 레이첼을 구하러 간다. 정의의 사도 배트맨이? 그랬다, 정의의 사도 배트맨이. 정의의 사도 배트맨은 정의의 검사 하비덴트를 먼저 구하지 않고, 자신의 연인 레이첼을 구하러 먼저 간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그의 선택을 비난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또한 '인간'이라는 것. 그 역시 늙고 병들고 편들며 피곤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므로 언제든 실수하고, 그가 실수할 때 그의 정의는 무너지며, 그는 강력하기에 그의 정의는 더 강력하게 부서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먼저 이것이다. 그의 '정의'를 진짜 '정의'라 할 수 있을까?
조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배트맨의 정의가 어떤 모순 위에 서 있는지. 그가 배트맨에게 두 사람의 주소를 바꾸어 말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배트맨이 자신의 신념대로 검사 하비덴트를 구하려 했다면 이 영화는 장렬하게 숨진 하비 덴트와 연인을 구한 배트맨 이야기로, 그러니까 배트맨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조커가 이겼다, 아니, 조커가 옳았다. 그의 통찰대로, 배트맨 또한 인간이었다. 조커에게 배트맨이란 공평함이라는 명분으로 가면을 쓴 채 세상의 질서를 제 맘껏 유린하는 또 한 명의 조커였을 뿐이다. 고담시에서 함께 재밌게 놀아보자는 그의 제안은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서로를 죽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유람선의 시민들과 범죄자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조커는 한 번 졌다. 이것으로 1 : 1 . 그러나 마지막 한 번의 실험이 더 있었으니 바로 하비 덴트였다. 그는 조커의 계략으로부터 목숨은 구했으나 연인을 잃고 지위도 잃고 위엄도 잃고 그리고 신념도 잃었다. 어둠의 도시를 구하려 했던 다크 나이트-배트맨을 대신하여 대낮의 도시까지도 구하려 했던 화이트 나이트-백색의 검사 하비 덴트는 부서졌다. 결합했던 모든 것들과 분리된 그에게서 터져버린 광기는 그를 투페이스(Two Face)로 만들어, 동전의 확률만을 공평함으로 맹신하도록 만든다. 그는 동전의 확률로 복수를 감행한다. 자신의 세계를 부숴버린 부패 경찰과 부패 검찰, 그 배신자들을 찾아가 동전을 던져 단죄를 결정한다. 앞면이 나오면 살고 뒷면이 나오면 죽는다. 그에게는 너무도 공평한 판단. 그러나 우리는 동의할 수 있을까? 배트맨의 준법과 조커의 혼돈과 하비덴트의 동전 중에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정의란 있는가?
불법적인 폭력으로 수호되는 준법도, 무자비한 폭력에 모두를 내던지는 혼돈도, 우연으로 운명을 결정하는 확률도 우리가 원하는 정의는 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폭력에 근거하고 있으며 어떤 동의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원하는 정의란 공평한 행복(혹은 최소한의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폭력, 동의, 행복. 이 세가지 중 어느 하나를 빼 놓고서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이들과 함께 묻는다. 정의를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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