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과 함께 쫄바지를!! 크리스토퍼 놀란, <다크나이트>(2008)
왜소한 근육과 골격은 늘 다시군의 콤플렉스였다. 중학교 3학년이 다 되도록 134cm를 넘어서지 못한 키 덕분에, 아버지의 걱정으로 들고 다녔던 거대한 알루미늄 사각 도시락은 반찬 자리까지 밥으로 꽉꽉 들어차 다시군은 학교에서 (고작) '도시락 소년'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더 그랬겠지만, 다시군은 푸르등등한 근육을 가진 이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들의 힘과 위엄이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수퍼맨, 후레쉬맨, 스파이더맨 등등. 그 중에도 다시군에게 단연 돋보이는 근육맨은 배트맨이었다. 아마도 다시군의 중학교 시절부터 배트맨 시리즈가 영화로 속속 제작되어 개봉한 영향이 있을 테다. 또한 손가락을 말아 펴서 얼굴에 뒤집어 올리고는 '뱃뜨~~매에~~~ㄴ!!'을 외치던 맹구가 시대를 풍미하던 때였기에 더욱 그랬을 테다. 그러나 그에 더해 다시군이 배트맨에 특별히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수퍼맨이나 스파이더맨과는 다른 매력이 그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정말 강하다. 그러나 그는 약점이 너무 많다. 그 약점이 그의 근육에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 그것이 그가 가진 매력의 근원이다. 그것이 그에게 인간미와 현실감이란 매력을 더하는 것이다. 그 약점을 넘어서기 위해 그는 작지만 화려하고 정밀하며 강력한 기계를 활용했다. 그것이 또 얼마나 멋지던지.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배트맨의 한계에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때, 배트맨은 새로운 무기로 위기를 반전시킨다. 그리고 결국, 승리하지 않는가. 터무니없이 악독한 악당들의 가공할 공격 앞에서 배트맨은 위태롭게 싸우지만 결국 승리하는 것이다. 그 인간다움이, 그 위태로움이, 그것이 만드는 긴장이 좋았다.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그런 영웅이 나타나 세상의 정의를 가져올 것 같았다.
그러다 2008년, 배트맨에게 품던 내 선망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든 영화 한 편을 만났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 그 두 번째 영화-『다크 나이트』(2008). 이 영화는 온갖 역경을 이기고 악당을 물리쳐 세상의 정의를 지켜낸 배트맨에게 다시 찬사를 보내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배트맨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악당들을 북돋고 '우-'하는 야유를 배경음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세상의 정의를 의심하게 한다. 어둠 속에 암약하던 배트맨을 밝은 조명 아래 끌고 나와 그가 배트맨인줄만 겨우 알아보도록 검정색 쫄바지를 입힌 다음에, 광장에 꿇어 앉히고 그를 몰아세우는 것이다. 배트맨을 아끼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분노할 상황. 그러나 안쓰러운 것은 배트맨의 입장이다. 대답을 이어갈수록 어째 궁지에 몰린다. 그를 고뇌하게 하는 질문은 의외로 간결하다. "네가 왜 영웅인지 증명해봐."
당연히 아닌 것을 아니라고, 혹은 당연히 맞는 것을 맞다고 말하는데 그게 대체 왜 당연하냐고 묻는 질문의 당황스러움이란... 그러나 이를 시작으로 이어가는 질문들이 만만치 않다. 정의와 준법, 영웅과 시민, 용기와 광기, 그리고 세상의 공평함에 대한 매서운 질문들. 배트맨은 과연 영웅인가? 정의를 지키기 위한 불법은 용인될 수 있는가? 법치와 혼돈, 혼돈과 우연 그 중에 공평한 것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 광기를 만드는가? 여느 블록버스터처럼 이 영화도 화려한 액션과 거대한 스케일로 긴장을 더하지만 다크나이트 안에서 그것은 그저 배경일 뿐, 그 모든 액션을 압도하는 이야기가 그 자체로 관객을 몰아부친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만큼 벼랑 끝의 질문에 고뇌하는 인물들을 살피며 나 역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한참을 올라가도록 일어서기 힘들었다. 그 질문들이 답을 찾지 못하고 내 안에서 무겁게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그 무거운 질문의 숲을 거닐고 싶었다. 무엇보다 액션에 열광하는 고등학교 남학생의 감성에 정확히 부응하면서, 근본적으로 우리들이 선망하는 그 '영웅'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 삶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그 일상적이며 근본적인 질문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도무지 듣기는 많이 들었으되 그 정체를 명확히 하려면 끝 간 데 없이 막막해 지는 또 하나의 끝판왕- 그 '정의'라는 것에게도 같이 대들어 보고 싶었다. 배트맨, 당신 정말 영웅 맞아?
1. 배트맨-당신은 영웅인가
먼저 살펴보는 것은 조커가 저지른 죄이다. 정말 나쁜 악당이니 등장할 때마다 수두룩하게 죄를 지어 주신다. 아이들과 함께 장면 장면을 돌이켜보며 그것이 어떤 죄인지 하나하나 적는다. 그리고 모둠별로 돌아가며 발표하면 살인, 협박, 납치, 고문, 강도, 방화, 살인교사, 도로교통법 위반, 주거침입 등등 그의 죄가 또렷하게 정리된다. 당연하지, 악당인데. 뭐 이런 시덥잖은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의 아이들에게 날카로운 눈썰미와 명확한 판단력 등등의 말로 한껏 칭찬을 늘어놓은 뒤, 질문 하나를 더한다. “자, 이제 배트맨이 저지를 죄를 정리해 보자.” 그럼 그렇지.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높아진다. 우리의 영웅이 죄를 저질렀다구? 물론, 그럴 수 있지. 살면서 사소한 죄 몇 개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 영화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배트맨의 죄를 정리하고 발표한다. "더도 덜도 말고 조커에게 적용한 기준, 꼭 그만큼만 배트맨에게 적용하세요."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주춤할 때마다, 아이들이 '영웅'이라는 말에 망설일 때마다 아이들 사이를 다니며 조용히 말해준다. 그랬더니 세상에, 무슨 죄를 이렇게 많이 저질렀어? 발표가 이어질수록 웅성거림이 높아진다. 배트맨이 지은 죄를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로교통법 위반 및 재물손괴죄-완전무장에 방탄장갑을 두른 배트카와 배트맨 바이크로 교통신호에 상관없이 온 도시를 그렇게 내달렸으니 당연히 도로교통법 위반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벌금이 몇 백만원일 테고, 일수벌금제를 운영하는 북유럽 국가라면 몇 백억을 내야 할 테다. 또한 조커를 잡기위해 질주하던 배트맨은 정차된 차들의 백미러를 몽땅 부수며 달리고 심지어는 제 길을 가로막는 차들을 멋지게(?) 폭파시키며 길을 열었으니 그 후련한 액션 만큼이나 남의 재산을 무단으로 손상시킨 죄 또한 후련하게 늘어간다.
건물 무단 침입 및 폭파, 방화, 폭행, 납치, 국제법 위반-고담시 마피아들의 자금을 관리하던 회계사 라우가 고담시와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홍콩으로 도망가자 검찰과 경찰의 마피아 수사는 한계에 부딪힌다. 그를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홍콩으로 잠입한 배트맨은 라우가 있는 고층건물에 침입, 유리창을 부수고 경호원을 폭행하고 그를 납치하여 고담시의 경찰서에 배달한다. 그 화려한 액션 스펙타클, 멋지다. 그러나, 세상에 이럴 수 있는가? 어느 날 63빌딩의 한 층 유리창을 박살내고 경호원과 경찰을 폭행하고는 사람을 공중으로 납치해 간 괴한이 있었는데, 사정을 알아보니 어느 힘센 나라의 중요한 범죄자를 잡기 위해 그리 한 것이란다. 그 나라는 우리나라와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았으며 사전에 협의도, 사후에 사과도 없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불법을 용납할 수 있는가?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도용-영화의 뒷부분, 조커를 잡기 위해 배트맨은 고담시의 모든 핸드폰을 잠수함의 소나(음파탐지기)처럼 활용하여 핸드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한다. 그야말로 핸드폰이 머무는 모든 곳에 불법적인 몰카를 설치한 셈인데, 이는 명백히 사생활 침해이다. 다시군이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중에 엉겁결에 학부모님의 전화를 받고는, 짐짓 점잖은 말투로 1학년 교무실에 있다고 하는 꼴을 누군가 볼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민주사회가 개인에게 보장하는 최소한의 '자유영역'인 '사생활'을 개인의 허락 없이 무차별적으로 넘나들며, 언제든 그 자유를 유린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이 기계는 민주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거대기계'이다.
공금횡령 및 유용 - 브루스 웨인이라는 한 남자가 배트맨으로 활동할 수 있는 데에 최첨단의 무기와 보호장비가 기여한 바는 절반 그 이상이다. 보는 이마다 우와!! 하는 탄성을 낼 수 밖에 없는 그 화려한 장비들-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브루스 웨인 개인의 재력과 기술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요긴한 기계들을 만드는 데에 회사의 역량을 활용했다. 이는 분명히 범죄이다. 브루스 웨인이 웨인 그룹의 소유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기업의 이익과는 전혀 관련 없이 자신의 개인 활동(?!)을 위해 기업의 재력과 역량을 제 맘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기업적인(혹은 자본주의적인) 기준에서도 지독한 오만이며 독선이고 무엇보다 불법이다. 기업의 수익이 오로지 소유주 개인의 노동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자신 이외에 기업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소유를 위한 한 개 부품 정도로 취급하는 태도는 민주주의의 근본을 훼손하는 것이므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도 이런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등등,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아이들과 함께 찾으며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웃으며 재밌게 신기하게 때로 진지하게 배트맨의 적법성을 따지던 학생들의 얼굴에 하나 둘 고뇌가 묻어 난다. 부글부글, 뭔가 맘에서 끓어오르는 것들이 언뜻 비장해 보이기도 하다. 아니 그럼, 배트맨이 그냥 범죄자라는 거야? 그는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우리들의 영웅 아니던가? 그럼 영웅을 향한, 정의를 향한 우리들의 선망이 잘못된 건가?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던 8등신 요정 세일러문부터 대사 한 마디 던질 때마다 몸동작을 달리하며 왜 처음부터 간결하게 합체한 에너지빔으로 괴물들을 끝내지 않는지 궁금했던 파워레인져까지, 그들에게 그렇게 들었고 박수치며 좋아했던 '정의'가 지금 무시당하는 것은 아닌가? 뭐야, 이거, 정의를 조롱하는 건가?..뭔가 알쏭달쏭해 하면서도 뭔가 억울한 표정의 학생들.
다시군, 즐겁다. 수업 중 다시군이 가장 즐거운 순간 - 학생들이 제 힘으로 찾아낸 질문에 골똘히 빠져 거닐 때, 문득 찾아낸 대답들을 서로 나누며 목청을 돋우고 대화를 나눌 때, 마치 다시군이란 선생은 이 자리에 없다는 듯이, 혹은 다시군은 좀 빠지라는 태도로, 때로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다시군에게 대들며(?!) 그렇게 온 힘으로 질문과 대화를 나눌 때. 지금 서서히, 그러한 순간으로 들어가는구나. 그래, 그렇지. 분명히 배트맨은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이다. 또한 분명히, 그는 조커와 같이 법을 어긴 범죄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종류의 범죄자라고 보기는 힘들지. 그래, 맞아. 자, 그럼 또 질문. 조커와 배트맨, 그들은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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